WORLD WIDE / EXHIBITION REPORT / ART × DESIGN
PICASSO × PAUL SMITH
THROUGH THE EYES
파블로 피카소 × 폴 스미스 — 예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TOKYO / THE NATIONAL ART CENTER, TOKYO / KOREAN × 日本語 / 2026
피카소를 다시 바라보는 방법
ピカソをもう一度見るための方法
거장을 다시 바라본다는 것. 우리는 파블로 피카소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체주의, 청색시대, 뒤틀린 얼굴과 분해된 시선, 20세기 미술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이름. 그러나 너무 잘 알려진 이름은 때때로 작품보다 먼저 도착한다. ‘피카소’라는 거대한 명성이 그림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볼 것인지까지 미리 결정해버리기도 한다.
巨匠をあらためて見つめるということ。私たちはパブロ・ピカソをすでに知っていると思っている。キュビスム、青の時代、歪んだ顔と分解された視線、20世紀美術の方向を変えた名。しかし、あまりにもよく知られた名前は、ときに作品より先に私たちの前へ到着する。「ピカソ」という巨大な名声が、絵の前で何を見るのかさえ先回りして決めてしまうことがある。
도쿄 국립신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는 바로 그 익숙함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이 전시는 피카소를 새롭게 설명하기보다, 그를 바라보는 환경 자체를 다시 디자인한다. 작품은 피카소의 것이지만 그 작품에 접근하는 색채와 패턴, 공간의 리듬에는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시선이 놓여 있다.
東京・国立新美術館で開催されている「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は、その慣れ親しんだ見方に小さな亀裂を入れる。この展覧会はピカソを新しく説明するというより、彼を見るための環境そのものを再びデザインする。作品はピカソのものだが、そこへ近づくための色彩、パターン、空間のリズムには英国のデザイナー、ポール・スミスの視線が置かれている。
2023년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은 피카소 서거 50주년을 맞아 폴 스미스에게 소장품 전시의 아트 디렉션을 맡겼다. 「Picasso Celebration: The Collection in a New Light!」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이 프로젝트는 피카소의 작품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실험이었다. 그리고 2026년 도쿄에서는 그 창의적 발상을 바탕으로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가 새로운 전시 경험으로 펼쳐진다.
2023年、パリの国立ピカソ美術館はピカソ没後50年を機に、所蔵作品展のアートディレクションをポール・スミスに委ねた。「Picasso Celebration: The Collection in a New Light!」と題されたこのプロジェクトは、ピカソの作品を現代的な感覚から見直すための実験だった。そして2026年の東京では、その創造的な発想を基盤に「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が新たな展覧会体験として展開される。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유명 화가와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결합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피카소의 작품을 보는 것’과 동시에 ‘폴 스미스가 피카소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경험한다.
重要なのは、これが単に有名な画家と有名なファッションデザイナーの名を組み合わせたイベント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展示室へ入った瞬間、観客は「ピカソの作品を見る」ことと同時に、「ポール・スミスがピカソをどう見たのか」を体験する。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거장을 본다는 것
他者の眼を通して巨匠を見るということ
전시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Picasso도 Paul Smith도 아닌 ‘through the Eyes’ 일지 모른다. 예술 작품은 변하지 않아도 작품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가 그것을 읽는 방식을 바꾼다. 벽의 색, 작품 사이의 거리, 조명, 패턴, 다음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선은 모두 관람자의 감각에 개입한다. 흔히 전시 디자인은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전시에서 공간은 수동적인 배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展覧会タイトルで最も重要な言葉は、もしかするとPicassoでもPaul Smithでもなく、「through the Eyes」なのかもしれない。作品そのものが変わらなくても、それを取り囲む環境は私たちの読み方を変える。壁の色、作品同士の距離、照明、パターン、次の空間へ移動する動線は、すべて観客の感覚へ働きかける。展示デザインは作品を引き立てるための背景だと考えられがちだが、この展覧会で空間は受動的な背景にとどまらない。
폴 스미스는 피카소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디자인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색채와 패턴, 예상하지 못한 조합과 유머를 이용해 작품 주변에 또 하나의 감각적 문맥을 만든다.
ポール・スミスはピカソを説明するために自分のデザインを前面へ押し出さない。その代わり、長年使ってきた色彩やパターン、意外な組み合わせ、ユーモアを用いながら、作品の周囲にもう一つの感覚的な文脈をつくる。
그 결과 피카소는 미술사 교과서 속의 거장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작품 앞에서 ‘이것이 어떤 사조에 속하는가’를 먼저 묻기보다 색을 보고, 표정을 보고, 유머를 발견하고, 공간과 그림 사이의 관계를 느끼게 된다. 거장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창한 해설부터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호기심 어린 눈을 빌리는 것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는 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その結果、ピカソは美術史の教科書にいる巨匠という位置から少しずつ抜け出してくる。作品の前で「これはどの美術運動に属するのか」と先に問うのではなく、色を見て、表情を見て、ユーモアを見つけ、空間と絵画の関係を感じるようになる。巨匠を理解するために、必ずしも大仰な解説から読み始める必要はない。ときには誰かの好奇心に満ちた眼を借りることが、作品へ近づくより良い方法になる。
피카소에게도 장난기가 있었다
ピカソにも遊び心があった
전시 초반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피카소가 잡지 이미지 위에 직접 개입한 드로잉이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잡지와 만화,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보는 것을 즐겼고, 이후 책과 인쇄물 위에 직접 그림을 덧붙이는 작업을 이어갔다.
展示の前半でとりわけ印象的なのは、ピカソが雑誌のイメージへ直接介入したドローイングである。ピカソは幼い頃から雑誌や漫画、文字とイメージを一緒に見ることを楽しみ、その後も本や印刷物の上へ直接絵を描き加える仕事を続けた。
전시장에 소개된 『Vogue Paris』 이미지 위의 드로잉에서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인물들이 몇 개의 선을 통해 기묘하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변한다. 거장의 이름 앞에서 관람자는 흔히 진지한 태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 작은 이미지들 앞에서는 피카소가 이미지를 가지고 놀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먼저 다가온다.
会場で紹介される『Vogue Paris』のイメージ上のドローイングでは、ウェディングドレスを着た人物たちが、数本の線によって奇妙で滑稽で、ときにグロテスクな存在へ変わる。巨匠という名の前で観客はしばしば真剣な態度を準備する。だが、この小さなイメージの前では、ピカソがイメージそのものと遊んだ人物だったという事実が先に迫ってくる。
선을 몇 개 더했을 뿐인데 기존 이미지의 의미가 무너지고 전혀 다른 인물이 태어난다. 그것은 단순한 낙서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다른 시선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피카소와 폴 스미스의 감각이 만난다. 둘 사이에는 시대와 장르의 거리가 있지만, 익숙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 변형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わずかな線を加えただけで既存イメージの意味が崩れ、まったく別の人物が生まれる。それは単なる落書きというより、すでに存在するイメージを別の視線へ転換する行為である。興味深いことに、まさにこの地点でピカソとポール・スミスの感覚は出会う。二人の間には時代とジャンルの隔たりがあるが、慣れ親しんだものをそのまま受け入れず、小さな変形から予想外の楽しさを生み出すという点では不思議な共通性が見えてくる。
폴 스미스의 언어가 피카소를 만났을 때
ポール・スミスの言語がピカソと出会うとき
이번 전시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공간 가운데 하나는 ‘Striped Room’이다. 폴 스미스에게 스트라이프는 단순한 장식 패턴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의 패션과 디자인 세계를 상징해 온 시각적 언어에 가깝다.
今回の展覧会で最も強く記憶に残る空間の一つが「Striped Room」だ。ポール・スミスにとってストライプは単なる装飾パターンではない。長年にわたり彼のファッションとデザインの世界を象徴してきた、視覚的な言語に近い。
전시장에서는 피카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트라이프와 폴 스미스의 감각이 만나면서 벽과 작품 사이의 경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선이 벽을 가로지르고 그 위에 피카소의 작품이 놓인다.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에서라면 작품을 방해한다고 판단했을 강한 패턴이 오히려 작품 속 색과 형태를 밖으로 끌어내는 장치가 된다.
会場では、ピカソの作品に現れるストライプとポール・スミスの感覚が出会うことで、壁と作品の境界が積極的に動き始める。色とりどりの線が壁を横切り、その上にピカソの作品が置かれる。通常のホワイトキューブであれば作品を邪魔すると判断されかねない強いパターンが、むしろ作品の中の色と形を外へ引き出す装置になる。
작품 안에 있던 선이 액자를 넘어 벽 전체로 증식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공간이 흥미로운 이유는 ‘폴 스미스 답다’는 시각적 즐거움 때문만은 아니다. 스트라이프는 피카소와 폴 스미스 사이에 존재하는 수십 년의 시간을 연결하는 하나의 디자인 문법이 된다. 회화 속 패턴과 패션 디자이너의 패턴이 같은 공간에서 충돌하고 공명한다. 예술과 디자인을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다.
作品の中にあった線が額縁を越え、壁全体へ増殖していくようにも感じられる。この空間が興味深いのは、単に「ポール・スミスらしい」という視覚的な楽しさのためだけではない。ストライプはピカソとポール・スミスの間に横たわる数十年の時間をつなぐ一つのデザイン文法となる。絵画の中のパターンとファッションデザイナーのパターンが同じ空間で衝突し、共鳴する。アートとデザインをあえて分けなくてもよい瞬間である。
색채가 공간의 온도를 바꾸는 순간
色彩が空間の温度を変える瞬間
그리고 전시의 온도는 갑자기 내려간다. 밝고 유쾌한 색채를 지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서면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마주하게 된다. 1901년부터 1904년 무렵 피카소의 화면을 지배했던 청색은 단순한 색채 선택을 넘어 고독과 가난, 상실과 우울의 정서를 품고 있다.
そして展覧会の温度は突然下がる。明るく愉快な色彩を通り過ぎ、暗い空間へ入るとピカソの「青の時代」と向き合うことになる。1901年から1904年頃までピカソの画面を支配した青は、単なる色彩の選択を越えて、孤独や貧困、喪失、憂鬱の感情を内包している。
전시 공간 역시 그 감정을 따라간다. 짙은 어둠 속 푸른빛의 작품은 밝은 공간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른 밀도를 갖는다. 관람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앞선 공간의 유희적인 리듬은 잠시 멈춘다.
展示空間もまた、その感情を追う。深い闇の中に浮かぶ青い作品は、明るい空間で見たときとはまったく異なる密度を持つ。観客の視線は自然にゆっくりとなり、それまでの空間にあった遊び心のリズムはいったん止まる。
색은 작품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벽의 색이 달라지자 몸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온도도 변한다. 이것은 폴 스미스의 아트 디렉션이 가장 명확하게 작동하는 순간 중 하나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공간의 색을 통해 관객이 작품의 정서에 먼저 들어가도록 만든다. 밝음과 어둠, 따뜻함과 차가움이 반복되면서 전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컬러 팔레트처럼 움직인다.
色は作品の中だけに存在するものではない。壁の色が変われば、身体が受け取る感情の温度も変化する。これはポール・スミスのアートディレクションが最も明確に機能する瞬間の一つだ。作品についての説明を並べるのではなく、空間の色を通して観客が作品の情緒へ先に入っていくようにする。明と暗、暖かさと冷たさが反復され、展示室は一つの巨大なカラーパレットのように動いていく。
작품을 걸어두는 것과 작품을 경험하게 하는 것
作品を掛けることと、作品を体験させること
좋은 전시는 좋은 작품을 많이 모아놓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을 먼저 만나고, 다음 작품까지 얼마만큼 걸으며, 어느 지점에서 시야가 열리고 닫히는지에 따라 관람의 기억은 달라진다.
良い展覧会は、良い作品を数多く集めるだけでは完成しない。どの作品に最初に出会い、次の作品までどれほど歩き、どの地点で視界が開き、また閉じるのかによって、鑑賞の記憶は変わる。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에서 폴 스미스의 존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회화 작품을 새롭게 만들지 않았음에도 전시 전체의 감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각 공간은 서로 다른 컬러와 패턴, 분위기를 갖는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시각적 장치와 벽화는 관람자가 전시장을 단순히 통과하는 대신 주변을 다시 살펴보게 한다.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でポール・スミスの存在が興味深いのは、彼が絵画そのものを新しく作っていないにもかかわらず、展覧会全体の感覚を変化させているからだ。それぞれの空間は異なる色、パターン、雰囲気を持つ。各所に隠された小さな視覚的仕掛けや壁画は、観客に会場をただ通過させるのではなく、周囲をもう一度見回させる。
다소 무거워질 수 있는 피카소의 미술사적 무게 사이에 유머와 발견의 순간이 끼어든다. 이러한 장치들은 작품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과 작품 사이에 존재하던 심리적 거리를 조금 줄여준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존하는 장소인 동시에 작품을 새롭게 경험하도록 만드는 장소라는 사실을 이 전시는 공간으로 보여준다.
やや重くなり得るピカソの美術史的な重みの間に、ユーモアと発見の瞬間が差し込まれる。こうした仕掛けは作品の権威を下げるものではない。むしろ観客と作品の間にあった心理的な距離を少しだけ縮める。美術館は作品を保存する場所であると同時に、作品を新たに体験させる場所でもあるということを、この展覧会は空間によって示している。
전시 디자인도 하나의 창작이 될 수 있는가
展示デザインも一つの創作になり得るのか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는 어디까지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ここで一つの問いが生まれる。作品をどのように見せるのかを決める行為は、どこまでを創作と呼ぶ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
큐레이터가 작품과 작품 사이의 의미를 연결한다면 아트 디렉터는 색과 재료, 패턴과 공간을 이용해 그 관계를 감각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물론 전시 디자인이 작품보다 앞에 나서는 순간 위험도 생긴다. 관람객이 작품보다 공간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전시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キュレーターが作品と作品のあいだに意味の関係を結ぶとすれば、アートディレクターは色、素材、パターン、空間を使い、その関係を感覚として見える形にする。もちろん、展示デザインが作品より前へ出る瞬間には危うさも生まれる。観客が作品より空間を記憶するなら、それは成功した展覧会なのかという問いも成り立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바로 그 경계를 흥미롭게 이용한다. 폴 스미스의 공간은 피카소를 장식하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가 아니라 작품 속에 이미 존재했던 색, 패턴, 유머, 사물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는 렌즈에 가깝다.
しかし今回の展覧会は、まさにその境界を興味深く利用している。ポール・スミスの空間はピカソを飾るための華やかな包装ではなく、作品の中にすでに存在していた色、パターン、ユーモア、物への関心を拡大するレンズに近い。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이 2023년 프로젝트에서 강조했던 두 창작자의 공통점 역시 사물, 의복, 유희에 대한 관심이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미술관에 들어왔기 때문에 피카소가 패션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패션을 만드는 사람이 지닌 색채와 재료, 배치에 대한 감각을 통해 우리가 피카소에게서 놓치고 있던 다른 면이 가시화된다. 그렇다면 아트 디렉션은 작품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パリの国立ピカソ美術館が2023年のプロジェクトで強調した二人の創作者の共通点も、物、衣服、遊びへの関心だった。ファッションデザイナーが美術館に入ったからピカソがファッションになったわけではない。むしろファッションをつくる人間が持つ色彩、素材、配置への感覚によって、私たちがピカソから見落としていた別の面が可視化される。そう考えるなら、アートディレクションとは作品の意味を変えるのではなく、作品を見るためのもう一つの窓をつくる仕事だと言えるだろう。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장을 다시 보는 일
知っていると思っていた巨匠を、もう一度見る
피카소는 너무 유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함 때문에 우리는 그를 실제 작품보다 이미지와 이름으로 기억할 때가 많다. 입체주의의 창시자, 천재, 20세기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인 동시에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만드는 벽이 되기도 한다.
ピカソはあまりにも有名だ。そしてその有名さゆえに、私たちは彼を実際の作品よりもイメージや名前として記憶することが多い。キュビスムの創始者、天才、20世紀の巨匠といった修飾語は、作品を理解する鍵であると同時に、作品との距離をつくる壁にもなる。
이번 전시는 그 벽에 작은 구멍을 낸다. 잡지 위에 장난스럽게 선을 그었던 피카소, 색에 몰두했던 피카소, 사물과 일상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바꾸었던 피카소를 만나다 보면 거장은 조금 더 인간적인 거리로 다가온다.
今回の展覧会は、その壁に小さな穴を開ける。雑誌の上へ遊ぶように線を描いたピカソ、色に没頭したピカソ、物や日常のイメージを絶えず別の形へ変えたピカソに出会っていくと、巨匠は少しだけ人間的な距離へ近づいてくる。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폴 스미스는 해설자가 아니라 시선을 제안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나는 피카소를 이렇게 보았다.’ 전시는 그 한 문장을 공간 전체로 확장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도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폴 스미스의 눈을 잠시 통과한 뒤 다시 자신의 눈으로 피카소를 바라보는 것이다.
そしてその過程で、ポール・スミスは解説者ではなく、一つの視線を提案する人として残る。「私はピカソをこう見た。」展覧会はその一文を空間全体へ拡張したように感じられる。観客に求められているのも、その視線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ことではない。ポール・スミスの眼を一度通過したあと、再び自分自身の眼でピカソを見ることである。
서로 다른 창작의 언어가 만나는 곳
異なる創作の言語が出会う場所
미술과 패션, 예술과 디자인을 나누는 경계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그러나 현대의 문화 공간에서 그 경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
美術とファッション、アートとデザインを分ける境界は長く存在してきた。だが現代の文化空間において、その境界は絶えず動いている。
폴 스미스는 옷을 디자인하지만 그의 작업은 색채, 사진, 건축, 오브제, 그래픽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왔다. 피카소 역시 회화에 머물지 않고 조각, 판화, 도자기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었다.
ポール・スミスは服をデザインするが、その仕事は色彩、写真、建築、オブジェ、グラフィックと絶えず結びついてきた。ピカソもまた絵画だけにとどまらず、彫刻、版画、陶芸など多様なメディアを横断した。
이번 만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보는 방법’을 끊임없이 바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사물에 다른 색을 입히고, 익숙한 형태를 비틀고, 예상하지 못한 요소를 병치한다. 창작은 때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르게 보는 순간에도 시작된다.
今回の出会いが自然に感じられるのは、二人が同じものをつくったからではなく、異なる領域で「見る方法」を絶えず変えてきたからだろう。見慣れた物に別の色を与え、見慣れた形をひねり、予想外の要素を並置する。創作はいつも完全に新しいものをつくることから始まるとは限らない。すでに存在するものを別の角度から見る瞬間にも始まる。
시간이 지나도 남는 전시
時間が過ぎても残る展覧会
전시는 결국 사라진다. 벽은 다시 칠해지고 작품은 수장고와 다른 미술관으로 돌아가며, 관람객이 걸었던 동선도 해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를 기록하는 사진은 단순한 인증 이미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展覧会はいずれ消えていく。壁は塗り直され、作品は収蔵庫や別の美術館へ戻り、観客が歩いた動線も解体される。だからこそ、展覧会を記録する写真は単なる記念写真以上の意味を持つ。
이번 WORLD WIDE의 사진 아카이브에는 피카소의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둘러싸고 있던 색, 벽, 패턴, 조명과 공간의 온도가 함께 기록된다. 그것은 ‘어떤 작품이 전시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2026년 도쿄에서 피카소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今回のWORLD WIDEの写真アーカイブには、ピカソの作品だけでなく、作品を取り囲んでいた色、壁、パターン、照明、そして空間の温度までが記録される。それは「何が展示されたのか」の記録であると同時に、「2026年の東京でピカソをどのように見直したのか」の記録でもある。
시간이 흐른 뒤 이 전시를 다시 떠올릴 때 작품 한 점의 이미지보다 강렬한 스트라이프 벽, 깊은 청색의 공간, 예상하지 못했던 색채의 충돌이 먼저 기억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전시가 남긴 하나의 작품일 수 있다.
時間が流れたあと、この展覧会を思い出すとき、一点の作品イメージよりも、強烈なストライプの壁、深い青の空間、予想外だった色彩の衝突が先に記憶へ戻ってくるかもしれない。だとすれば、それもまた展覧会が残した一つの作品になり得る。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경험이다. 그러나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가 한 페이지의 전시 아카이브로 남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이 전시는 우리에게 피카소를 보여준 뒤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예술을 무엇으로 보는가. 눈으로 보는가. 지식으로 보는가. 기억으로 보는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통과한 뒤 비로소 자신의 시선을 발견하는가.
パブロ・ピカソの作品に出会えたという事実だけでも十分に特別な経験だ。だが「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が一ページの展覧会アーカイブとして残る価値には、もう一つの理由がある。この展覧会はピカソを見せたあと、一つの問いを残す。私たちは芸術を何によって見るのか。眼で見るのか。知識で見るのか。記憶で見るのか。それとも誰か別の人の視線を通過したあと、ようやく自分自身の視線を見つけるのか。
작품은 그대로였지만, 보는 방법은 달라졌다
作品はそのままでも、見る方法は変わった
피카소를 다시 그릴 필요는 없다. 그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디자인하면 된다.
ピカソをもう一度描き直す必要はない。彼を見る方法を、もう一度デザインすればいい。
피카소의 작품은 그대로였지만 폴 스미스가 만든 색과 패턴, 공간을 통과한 순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피카소는 조금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ピカソの作品はそのままだった。けれどポール・スミスがつくった色、パターン、空間を通過した瞬間、私たちが知っていると思っていたピカソは少し違う顔を見せた。
어쩌면 좋은 전시는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던 작품 앞에 다시 서게 만드는 것.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폴 스미스가 피카소에게 더한 가장 중요한 아트 디렉션일 것이다.
良い展覧会とは、新しい作品を見せることだけを意味するのではないのかもしれない。すでに存在していた作品の前へ、もう一度立たせること。よく知っていると思っていた芸術を、初めて見るように見つめさせること。それこそが今回の展覧会でポール・スミスがピカソへ加えた、最も重要なアートディレクションなのだろう。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
한 거장의 작품을, 또 다른 창작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다시 본다.
一人の巨匠の作品を、もう一人の創作者の眼を通して見る。そして最後には、私たち自身の眼でもう一度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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